強制癒着
나에게 회사의 불명예 이미지를 덮기 위한 수단이 되라고 한다. 어렸던 시절부터 그에 대해 쌓아왔던 미움은 이제 증오가 되어간다. 그래, 분명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관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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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AU (OOC)
















그녀가 사라졌다.



그것은 문장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유일한 기둥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소리였다. 처음 며칠, 강지혁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기를 거부했다. 그의 세상에서 성유나가 ‘사라지는’ 일 따위는 성립할 수 없는 명제였다. 누군가 감히 자신의 것을 훔쳐 갔거나, 혹은 그녀가 어리석은 반항심에 잠시 몸을 숨겼을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기만했다.



"찾아내. 당장."



서강건설의 정보망과 그의 사적인 인력들이 거미줄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CCTV 영상은 픽셀 단위로 분석되었고, 그녀의 모든 주변 인물들은 그림자 같은 감시 아래 놓였다. 그의 펜트하우스는 거대한 지휘 본부가 되었다. 밤낮없이 울리는 전화, 벽면을 가득 채운 지도와 서류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강지혁. 그는 잠을 자지도,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와 타는 듯한 조바심만이 그의 생명줄인 양 위태롭게 그를 지탱했다. 그의 서늘한 눈은 이제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직원들은 그의 그림자만 밟아도 얼어붙었다. 모든 회의는 고성과 윽박으로 끝났고, 사소한 실수에도 가차 없는 해고 통보가 날아들었다.

한 달이 지났다. 그녀의 마지막 행적은 집 앞 골목길을 비추던 낡은 CCTV 영상에서 끊겨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녀는 세상에서 증발해 버렸다. 흔적도, 단서도, 목격자도 없었다. 서서히, 강지혁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이 단순한 유괴나 숨바꼭질이 아님을. 그의 통제와 권력이 닿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상실임을.

그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그는 텅 빈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모든 것이 그녀가 떠나기 전 그대로였다. 침대 위에 놓인 낡은 곰 인형, 책상 위에 펼쳐진 채 마르지 않은 잉크 자국이 남은 노트,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몇 올 묻어있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희미하게 남은 그녀의 체향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자,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오만과 분노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억눌린 흐느낌이었으나, 이내 참을 수 없는 통곡이 되어 터져 나왔다. 왕국을 잃은 왕처럼, 그는 텅 빈 방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어디에... 어디에 있는 건가, 성유나...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그날 이후, 강지혁은 유령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분노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모든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해, 텅 빈 심연만을 담고 있었다. 최연소 이사라 불리던 남자의 총기는 사라지고, 생기 없는 인형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중요한 보고 자리에서도 그는 창밖의 허공만을 응시했고, 비서가 몇 번을 불러야 겨우 고개를 돌렸다.



"... 나가보도록 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그것뿐이었다. 그의 세계는 멈췄다. 그녀가 사라진 그날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그는 더 이상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고, 과거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직 그녀가 ‘있었던’ 순간과 ‘없는’ 현재 사이의 무한한 공백 속을 부유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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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이 지났다. 완벽했던 그의 슈트 차림은 흐트러졌고, 서강건설 이사실의 불은 꺼질 줄 몰랐으나 그 안에서 나오는 결정들은 점차 이성을 잃어갔다. 그는 그녀가 다녔던 대학 강의실을 통째로 사들이고, 그녀가 즐겨 찾던 도서관의 서가를 뒤엎으며 그녀의 흔적을 갈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강지혁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서강가의 저택, 예전에 그녀와 잠시 동거했던 그 방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곳은 이제 강지혁에게 성역이자 무덤이었다.

어스름한 새벽, 그는 침대 옆 스탠드 하나만을 켠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고 해진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어린 시절, 보육원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그녀가 둘러주었던 유일한 온기. 그는 그 머플러에 코를 묻고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그녀의 살결 냄새를 찾으려 애썼다.



"... 유나야. 성유나."



그는 이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오는 듯했다. 오만했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부유했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피곤할 때 먹으라며 건네주었던 딸기맛 포도당 사탕 껍질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유리함 속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와 맞추었던, 금색 밴드에 흰 다이아가 박힌 결혼반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영원히 내 곁에 있겠다고... 내 세계의 일부가 되겠다고 약속했지 않나? 그런데 왜 나만 여기 남겨두고 사라진 거지? 이건 반칙이야..."



그는 이제 환각을 보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려도 그녀가 "이사님, " 혹은 "선우야, " 하고 부르며 들어올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문 너머에는 차가운 정적과 그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서들뿐이었다. 그는 이제 회사 업무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서강건설의 주가는 폭락했고, 이사회에서는 그의 해임안이 거론되었지만 그는 상관없었다. 그에게 세상은 성유나라는 태양이 사라진 후 암흑으로 변해버린 폐허일 뿐이었으니까.

밤마다 그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고, 저 멀리서 성유나가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뻗으면 그녀는 한 줌의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는 식은땀에 젖은 채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통증이 실재했다.



"차라리 죽여줘... 이렇게 숨만 쉬게 하지 말고, 차라리 나를 파멸시켜 달란 말이야."



그는 그녀가 남긴 사탕 껍질을 손에 꼭 쥔 채, 차가운 방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 최연소 이사, 서강건설의 후계자, 오만했던 강지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엔 그저 소중한 것을 잃고 길을 잃어버린, 버림받은 어린아이 하나가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남긴 부스러기 같은 기억들을 양분 삼아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부재는 그의 영혼을 좀먹는 독이 되었고, 그는 서서히 자신을 파괴해 갔다. 한때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했던 남자는,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을 줘도 단 한 사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잔인한 진리 앞에 무너져 내린 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겨울 속에 갇혀버렸다. 그의 시간은 그녀와 함께 멈췄고, 그의 세상은 그녀의 부재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