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을 보시기 앞서 이 내용에는 자살이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유의해서 관람해 주세요.
힌트: 강지혁과 성유나가 처음 만난 날 (4자리)

그녀가 사라진 날은 몰디브의 한 새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졌다기보다는 '증발'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침대 시트에는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었고, 베갯잇에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마치 쉼표처럼 누워 있었으나, 그녀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지혁은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울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었다. 다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을 뿐이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사라졌다. 그 찰나의 감각이, 그가 그녀와 나눈 마지막 접촉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 유나."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그 이름을 부르면, 27년간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 없던 세상이 다시금 그녀를 그의 품 안에 돌려줄 것이라 믿는 것처럼. 그러나 세상은 처음으로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졌던 그 오만한 황태자에게, 세상은 처음으로 '결핍'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ㅡ
그녀가 사라진 후 백일 동안,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언어를 잊어버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오직 짐승의 신음과 같은 낮은 호흡뿐이었다.
의사는 그것을 '선택적 함구증'이라 진단했고, 정신과 전문의는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라 명명했지만, 지혁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그녀의 이름 외에 다른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이 그녀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ㅡ
봄이 왔다. 빌라의 정원에 햇빛이 살며시 내려와 따스히 비추지만 지혁은 커튼을 걷지 않았다.
빛은 잔인했다.
빛은 그녀의 부재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비추었기에.
"여보, 오늘은...... 무슨 요일이지?"
그는 텅 빈 식탁의 맞은편을 향해 물었다. 식탁 위에는 두 사람 분의 식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수프
그녀가 즐겨 마시던 얼그레이 홍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만 없을 뿐.
지혁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않았다. 그는 '성유나의 남편'이라는 호칭만을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으로 삼았다. 서강건설의 후계자라는 거대한 왕관은 그녀가 사라진 그 새벽, 침대 머리맡에 영원히 벗어두었다. 그 왕관은 이제 녹슬어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빌라의 문을 두드렸을 때, 지혁은 면도조차 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한때 서늘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던 그의 눈빛은, 이제 깊은 우물 속에 가라앉은 동전처럼 빛을 잃은 채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내가 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악기에서 나오는 불협화음처럼.
"그곳에 그녀가 있나? 없잖아. 그러면 그곳은 나에게 무(無)야. 무를 위해 내가 발걸음을 옮길 이유가 있다고 보나? 당장 꺼지도록 해. 그녀가 돌아왔을 때, 너희 같은 속물들의 발자국이 그녀의 정원을 더럽힌 걸 보면...... 그녀가 슬퍼할 테니까."
결국 그는 강제로 한국에 끌려왔다.
서강건설 대회의실. 백 명에 가까운 임원들이 그를 둘러쌌다. 할아버지가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쳤다.
"지혁아! 정신 차려!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네 인생을 이렇게 망칠 셈이냐!"
'그깟 계집'.
그 단어가 지혁의 고막을 파고든 순간, 그의 텅 빈 동공에 처음으로 살의(殺意)에 가까운 빛이 어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핏기 없는 입술이 백일 만에 처음으로 움직였다.
"...... 다시 한번. 그녀를 그렇게 부르면."
서늘한, 너무나도 서늘해서 오히려 뜨겁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 건물에 있는 모두를, 한 명도 남김없이 지옥으로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할아버님부터."
그날 이후, 누구도 그의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녀는 사라졌으나, 그녀의 부재(不在)는 강지혁이라는 제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ㅡ
가장 잔혹한 것은 시간이 아니었다. 사물들이었다.
그녀가 쓰던 머그컵은 매일 아침 그를 비웃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펼쳐둔 오만과 편견의 책장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거리며 그녀의 음성을 흉내 냈다.
"우리 관계는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같지 않아요?"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그 사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딸기맛 포도당 사탕.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그녀가 그의 손에 살며시 쥐여주었던 그 작은 위로.
그 사탕은, 마치 호박 속에 갇힌 곤충처럼, 영원히 녹지 않는 그녀의 마지막 다정함이 되어 그를 미치게 했다.
그는 매일 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응시했다. 먹어버리면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질 것 같아서, 그렇다고 두면 언젠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아서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다시 뱉기만을 반복했다. 차마 삼킬 수도, 차마 버릴 수도 없는 그 작고 둥근 알갱이는, 그가 그녀에게 행사했던 모든 통제와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피곤하실 때 드세요. 단 게 들어가면 좀 나아져요."
그녀의 음성이 환청처럼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지면, 그는 짐승처럼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결혼반지를 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내가...... 내가 그때 더 다정했더라면. 내가 너를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너는 떠나지 않았을까. 응? 유나야. 대답을 해줘. 한 번만이라도......"
대답은 언제나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백만 마디의 저주보다 더 잔인했다.
살이 빠져 헐거워진 손가락 위에서는 금색 밴드가 위태롭게 흔들릴 뿐.
"... 기억하나? 네가 나에게 했던 그 말. '저는 당신의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예요.'...... 동반자라니. 동반자라는 말은 함께 걷는다는 뜻이지, 한 사람만 길 위에 버려두고 다른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잖아..."
ㅡ
밤이 깊어지면 그의 광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어둠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그 어둠만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는 매일 밤 악몽 속에서 그녀를 만났다. 보랏빛 눈동자가 안갯속으로 사라져 가는 꿈, 그녀의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놓고 떠나가는 꿈.
"가지 마......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는 잠결에 허공을 움켜쥐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빌라의 높은 천장에 그의 흐느낌이 메아리쳤고, 그 메아리는 다시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어둠을 무서워하던 그 어린 소년 하선우가, 그녀라는 이름의 머플러를 잃어버린 채 다시 한번 거대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ㅡ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아니, 삼십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지혁에게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그녀가 있던 '이전'과 그녀가 없는 '이후'로 양분된 거대한 단절이었을 뿐.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몰디브의 그 빌라로 돌아왔다. 신혼여행을 보냈던 바로 그곳. 그녀가 마지막으로 숨 쉬었던 그 공간. 그는 그곳을 통째로 사들이고, 어떤 가구 하나도, 어떤 먼지 하나도 옮기지 못하게 했다. 그곳은 더 이상 별장이 아니라 성소(聖所)였고, 박물관이었으며, 그의 무덤이었다.
매일 아침, 지혁은 그녀가 좋아하던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어린 시절 그녀가 둘러주었던 낡은 머플러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그녀와 함께 읽었던 오만과 편견을 펼친다. 그리고 가장 좋아했던 구절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내 애정과 소망은 변치 않았소. 그러나 한 마디만 해주시오, 그러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영원히 침묵하겠소."
읽기를 마치면, 그는 책을 덮고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그녀와의 비밀 신호를 그렸다.
ㅡ
가을이 왔다. 그가 그녀를 언제 잃었는지 기억조차 안나는 밤. 지혁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면도를 했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검은색 슈트를 꺼내 입었다.
거울 속에는 한때의 강지혁이 서 있었다.
오만했고, 완벽했으며,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살아있는 자의 광채가 아닌, 이미 죽은 자의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빌라의 모든 등을 켰다. 그녀가 어둠을 싫어하는 자신을 위해 항상 미리 켜두던 그 따뜻한 불빛처럼. 그리고 그녀의 화장대 앞에 앉아 한참을 그녀의 향수병을 어루만지다가, 마지막으로 그 사탕 하나를 입속에 넣었다.
달았다. 너무나 달아서, 눈물이 났다.
"...... 이게 네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맛이었구나, 여보."
그는 천천히 해변으로 걸어 나갔다.
가을의 바닷바람이 그의 슈트 자락을 흔들었다.
손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 둘러주었던 낡은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색은 바랬고, 올은 풀렸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철썩-
파도가 그의 구두를 적셨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발목을 감싸고, 무릎을 적시고, 허리까지 차올랐지만, 지혁은 마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듯 평온했다.
오히려 그 차가움이 그의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몰디브의 가을밤은 잔인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마치 그녀의 눈동자처럼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나야......"
그는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슬프지도, 절박하지도 않았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이름을 부르듯, 다정하고 부드럽게.
"너는 알고 있었나... 내가 너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남자라는 걸. 너는 그렇게 똑똑했으면서, 어떻게 그 사실 하나만은 모른 척했던 거지."
파도가 그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는 손에 쥔 머플러를 바닷물 위에 살며시 띄웠다.
머플러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잠시 수면 위를 떠다니다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이거라도 먼저 보낼게. 너에게 닿거든, 내가 곧 따라간다고 전해주겠나?"
지혁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검은 바닷물 위에, 보이지 않는 글자를 천천히 새겨 넣었다.
그것은 그들 둘만이 알아볼 수 있었던 비밀스러운 언어, 그들의 영혼을 이어주던 가장 짧고도 가장 깊은 약속.
-..-.-..--..
사랑한다. 백만큼. 천만큼.
영원만큼.
그는 서늘하게, 그러나 처연하리만큼 미소 지었다. 한때 그녀를 향해서만 보여주었던 그 다정한 미소를. 거대한 파도 하나가 밀려와 그를 감쌌을 때,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을 활짝 벌려 그 차가운 어둠을 끌어안았다. 마치 오랜만에 그녀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그 마지막 순간, 그는 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의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친 듯 밝은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여보,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너무나 따뜻해서, 그동안 시리도록 차가웠던 그의 영혼이 비로소 녹아내렸다.
다음 날 아침, 몰디브의 해변은 거짓말처럼 잔잔했다. 황금빛 햇살이 모래사장을 어루만졌고, 갈매기들이 평화롭게 날아올랐다. 빌라의 정원에서는 자귀나무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고, 그가 그녀를 위해 심어두었던 라넌큘러스가 만개해 있었다.
해변의 한 귀퉁이에는 작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파도에 밀려온 낡은 머플러 한 자락.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결혼반지.
금색 밴드에 흰 다이아가 박힌 그녀의 반지와, 그의 반지가 마치 손을 맞잡은 듯 가지런히 모래 위에 놓여 있었다.
강지혁이라는 남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을 뿐이다.
그가 평생을 두려워했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면 더 이상 무섭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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