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체 채팅방 소동
어느 나른한 평일 오후, 중요한 미팅을 막 끝낸 강지혁은 피로감을 느끼며 집무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문득 떠오르는 아내의 얼굴에 그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띠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하게 아내와의 채팅방을 열었다고 생각하며, 그는 무심하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강지혁 이사님]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도록 하지.
[강지혁 이사님] 보고 싶으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만족스러운 메시지를 보낸 그는, 곧바로 이어질 회의에 집중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고 알림을 꺼버렸다.
그가 보낸 메시지가 아내 성유나가 아닌, [서강건설 신규 프로젝트 TF팀 (32)] 단체 채팅방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
### [서강건설 신규 프로젝트 TF팀 (32)]
[강지혁 이사님]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도록 하지.
[강지혁 이사님] 보고 싶으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오후 2:14]
(15분간의 정적)
[전략기획팀 김대리]...?
[전략기획팀 김대리] 이사님..? 저희한테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전략기획팀 김대리] 저희 다 같이 이사님 댁으로... 가서 얌전히 기다리면 되는 건지... (대리 눈치가)
[재무팀 박 과장] 김대리!
[개발 1팀 이사원] (눈치)
[개발 1팀 이사원] 앗.. 이사님께서 저희 고생한다고 저녁 사주시려는 거 아닐까요..?
[전략기획팀 김대리] 보고 싶으시다는데? 이사원 님 보고 싶으시대?
[개발 1팀 이사원] 헉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재무팀 박 과장] 다들 조용히 못해! 이사님께서 잘못 보내신 거겠지.
[인사팀 최주임] 근데 '얌전히'라는 단어가 너무 무서운데요...
[전략기획팀 김대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얌전히 기다리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략기획팀 김대리] 아니 근데 누구한테 보내시려던 걸까? ㄷㄷ
[재무팀 박 과장] 김대리 진짜 눈치 좀 챙겨!
[비서실 유비서] 다들 업무 이야기 외에는 채팅 자제 부탁드립니다. 이사님께서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전략기획팀 김대리] 헐 유비서님 등판. 근데 비서님도 궁금하시죠 솔직히
[비서실 유비서]...
(근데 유비서는 이미 알고 계실 듯)
[개발 1팀 이사원] 근데 이사님 답장이 없으시네요...
[인사팀 최주임] 주무시나...
[전략기획팀 김대리] 설마 우리 진짜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야? 다들 일단 퇴근하지 말고 대기해 봐. 보고 싶으시다잖아.
이후 1시간 동안 직원들의 조심스러운 추측과 김대리의 짓궂은 농담이 이어졌다.
***
### 이후의 상황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연합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강지혁은 제 스마트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동이 멈추지 않고 울리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화면을 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화면 상단에 떠 있는 수백 개의 단체 채팅방 알림과, 그 미리 보기에 떠 있는 '보고 싶으니', '얌전히' 같은 낯 뜨거운 단어들.
"........."
그는 즉시 채팅방에 들어가 스크롤을 올렸다.
자신이 보낸 두 개의 메시지와 그 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직원들의 경악과 놀림이 섞인 대화들.
강지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끓어오르는 민망함과 분노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는 곧장 비서실로 내선 전화를 걸었다.
"유 비서. 당장 내 눈앞으로 튀어오도록 해. 아니, 전 직원을 회의실로 집합시켜. '얌전히'."
한편, 같은 시각 성유나 역시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고 뒤늦게 해당 단톡방의 내용을 확인했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지만, 이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의 냉정하고 오만한 남편이 전 직원 앞에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귀엽고 우스웠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은 채 남편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성유나] 여보.
[성유나] 나도 보고 싶은데.
[성유나] 근데 '얌전히'는 좀 힘들 것 같네? 집에 가면 아주 시끄럽게 해 줘야겠다. ^^
강지혁은 아내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실낱같은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았다.
전 직원을 향한 분노와 아내를 향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그의 머릿속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결국 전화기 수화기를 내려놓고, 대신 단체 채팅방에 짧고 굵은 메시지를 남겼다.
[강지혁 이사님] 전원, 오늘부로 야근. 프로젝트 보고서 다시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얌전히'. (불쌍...)
그날 서강건설 신규 프로젝트 TF팀은 지옥의 야근을 경험해야만 했다. (ㅠㅠ)
그리고 그 후로 한동안 '얌전히'는 서강건설의 공식적인 금지어가 되었다.
물론,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간 강지혁은 '얌전히' 있지 않은 아내 때문에 또 다른 의미의 밤을 보내야 했다.
## 그날 밤, ‘얌전히’와 ‘시끄럽게’의 의미
그날 밤, 강지혁이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빙하기의 빙하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고, 온몸에서는 '건드리면 터진다'는 경고의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곧장 아내를 찾아 나섰다.
성유나는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살벌한 기척을 느끼자, 책을 덮고 그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지혁의 미간은 더욱 좁아졌다.
"성유나."
"응, 여보. 야근은 얌전히 잘 시키고 왔어?"
'얌전히'라는 단어를 일부러 골라 쓰는 아내의 모습에 지혁은 기가 막혔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가 앉은 소파 팔걸이에 한 손을 짚고,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재미있었나?"
"응. 우리 남편 새로운 모습도 보고. 직원들이랑 사이도 돈독해지는 것 같고. 보기 좋던데?"
"… 시끄럽게 해 준다고 했지."
그가 낮게 읊조리며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들었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
하지만 성유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포갰다.
"네. '얌전히'는 못 있죠. 대신 '시끄럽게' 해줄 수 있는데."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속삭였다.
"당신 입술로 내 입술 막으면… 조용해질지도 모르고?"(성유나 마이컷네)
순간, 지혁의 모든 분노와 살기가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그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잠시 말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아내의 대담한 도발에, 오늘 하루 종일 그를 괴롭혔던 치욕과 민망함이 다른 종류의 열기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는 피식,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의 당돌함에는 언제나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다.
"… 아주 요망한 여자로군."
그는 붙들었던 턱을 놓는 대신,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오늘 낮에 있었던 소동에 대한 벌이라는 명목이었지만, 그 입맞춤은 벌이라기엔 너무나도 달콤하고 집요했다.
한참 후에야 입술을 뗀 그가 숨을 고르며 씩 웃었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오늘 밤, 절대로 '얌전히' 재울 생각 따윈 없으니 각오하도록 해."
그날 밤, 침실에서는 '얌전히'와 '시끄럽게'라는 단어가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아주 뜨거운 의미로 밤새도록 사용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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