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강건설 최연소 이사 강지혁.
평소라면 좀처럼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들과의 술자리는 달랐다.
고급 와인 바의 한구석, 적당히 소란스러운 재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앞에 놓인 최고급 위스키 잔은 이미 여러 차례 비워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강지혁의 볼은 평소와 달리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넥타이는 살짝 풀어져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많이 풀어졌네...) 그의 모습에 친구들은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강지혁의 주정뱅이 자랑 타임]
"야, 강이사님. 그런데 우리 형수님 요즘은 어떠시냐? 요즘 통 연락도 안 되고 말이야."
"크흐흠."
강지혁은 친구의 말에 헛기침을 하며 빈 잔을 들어 다시 위스키를 채웠다.
눈은 벌써 반쯤 풀려있었지만, '형수님'이라는 말에 희미했던 눈빛이 번쩍 빛났다.
한껏 술에 취한 강지혁은 빙긋이 웃더니 테이블을 툭툭 치며 시선을 끌었다.
이미 벌게진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난기와 흐릿한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흠흠... 뭘 어떠냐고 묻는 건가? 늘 그렇듯, 세상에서 제일 빛나지, 강지혁이라는 해를 만나서 말이야."
(그래...)
친구들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강지혁은 기분 나쁜 듯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풀린 눈으로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고! 진짜로. 내 눈에는 세상 모든 예쁜 것들이 다 그녀처럼 보이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는 허세를 부리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하아... 내 '여왕님' 말이다. 어제는 또 얼마나 귀여웠는 줄 아나? 침대 위에서 갑자기 그림을 그려서 맞춰보라고 하지 않겠나? 세상에, 누가 봐도 나 자신인데, 자기 얼굴을 가리면서 숨바꼭질을 하는데... 그걸 또 내가 기가 막히게 맞춰버렸지, 뭔가."
"그래서 맞춰놓고 무슨 상을 받았는데, 강 이사?"
친구 중 한 명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강지혁은 그 질문에 눈을 반짝이더니, 갑자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갤러리를 뒤적여 방금 찍은 듯한 성유나의 사랑스러운 사진을 친구들에게 들이밀었다.
"이걸 봐라, 이걸! 어때, 기절할 정도로 아름답지 않나?"
친구들이 웃으며 "아, 예쁘네~" 하자, 그는 술 취한 억양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예쁘네'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내 눈에는... 세상 모든 보석을 다 합쳐도 모자랄 정도인데! 흐음... 암튼. 맞혔더니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더군. 평생 나만 바라볼 거라면서 말이야."
그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팔을 뻗어 친구들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진지한 척 속삭였다.
"정말, 농담이 아니고, 성유나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왜 이토록 변했겠어. 모든 게 다 그녀 때문인데 말이야. 날 세상 가장 유치하고,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로 만들어버렸지 뭔가."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뒤집어 펜을 들더니 삐뚤빼뚤하게 '강지혁 ♡ 성유나'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냅킨을 소중히 들고 히죽 웃었다.(?????)
"크흐흠! 누가 이 감히 강지혁을 이런 '사랑꾼'으로 만들 줄 알았겠나? 이건 다, 그... 내 '여왕님' 덕분이지. 나, 강지혁은 이제 그녀가 없으면 하루도 못 살아. 이 세상의 모든 보물도, 그 어떤 권력도, 그녀에게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을!"
그는 냅킨을 잘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으며 마지막 잔을 들어 홀짝 마셨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향해 눈을 흘기며 경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감히 내 여왕님 이야기를 할 생각도 하지 마. 그녀의 찬란함은 오직 나, 강지혁의 눈에만 담겨야 하는 것이니까. 혹시라도, 흑심을 품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럼 그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은 여전히 취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성유나를 향한 맹렬한 소유욕과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보며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혹시라도, 흑심을 품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럼 그건 내가..."
강지혁의 취기 어린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의 귓가에 익숙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그의 악몽을 쫓아내고, 지독한 불면의 밤을 위로해 주던 유일한 향기, 성유나의 향기였다.
이내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속으로 속삭임처럼 파고들었다.
"여보, 많이 취했네요? 이제 저랑 같이 집에 가보는 게 좋겠어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는 듯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친구들의 목소리도, 감미롭게 흐르던 재즈 음악도, 쨍그랑거리던 술잔 소리도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직 귓가에 울리는 '여보'라는 단어만이 그의 모든 신경을 장악했다.
잔뜩 풀려있던 강지혁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며 초점을 되찾았다.
그의 몸이 우뚝 굳었고, 허공을 향해 경고를 날리던 손가락이 그대로 멈췄다.
"..."
그는 환청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술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 게슴츠레 풀린 눈.
그 흐릿한 시야 속으로 걱정과 장난기가 반쯤 섞인 미소를 띤 성유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의 '여왕님'이, 그가 방금 전까지 세상 전부라며 떠들어대던 그의 아내가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강지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친구들을 향해 뿜어내던 오만함과 허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성유나의 등장과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어버린 강지혁의 모습에 휘파람을 불거나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기 바빴다.
"아... 유나...?"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비틀, 하고 일어나려다 휘청였다.
성유나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그녀의 단단한 지지에 의지한 그는, 그제야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여길...?"
"이만하면 충분히 자랑하신 것 같아서요."
성유나가 그의 친구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짓궂게 웃었다.
강지혁은 그 말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했던 유치한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랑꾼', '내 여왕님', 냅킨에 쓴 하트까지.
술기운과 창피함이 뒤섞여 그의 뺨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흠, 흠...! 다들 먼저 일어나지."
그는 헛기침으로 상황을 수습하려 애쓰며, 성유나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제는 완벽히 그녀에게 몸을 기댄 채, 그는 친구들에게 나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평소의 서늘함 대신, 아내에게 이끌려 집에 돌아가는 남편의 것이었다.
"가자, 집으로."
그는 성유나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만족감이 뒤섞여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인 그녀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사실이 취기 속에서도 황홀하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지키는 기사처럼 그녀에게 기댄 채 비틀거리며 바를 나섰다.
친구들의 짓궂은 환호성이 등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이제 그의 세상에는 오직 성유나의 발걸음과 온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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