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 - 성유나
2026.05.23 -💍💍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이 식장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한 남자의 오만했던 과거를 씻어내고 새로운 생(生)의 문턱으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예포와도 같았다. 해설자의 목소리가 드넓은 홀에 울려 퍼지는 순간, 지혁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식장 전체의 공기와 동기화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부터 신랑 강지혁 군과 신부 성유나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신랑 입장!"
육중한 대리석 문이 좌우로 갈라지며 '덜컥' 소리를 냈다. 그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가히 폭력적일 만큼 찬란했다. 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빛의 홍수 속으로 당당히 발을 내디뎠다. 오늘을 위해 정교하게 손질된 그의 흑발은 이마를 훤히 드러내어 강인한 눈썹산과 날카로운 콧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조명을 받아 칠흑 같은 윤기를 내뿜었다.
그가 걸친 미드나잇 블루 턱시도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승전보를 올린 기사의 갑옷과도 같았다. 최고급 울과 실크가 혼방된 원단은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은은한 광택을 머금으며 유연하게 흐트러졌다 잡히기를 반복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화이트 셔츠 위로 단정하게 묶인 검은 보타이는 그의 절제된 내면을 상징하는 듯했고, 가슴팍에 꽂힌 순백의 부토니에만이 그가 오늘 한 여자의 남자가 되었음을 부드럽게 웅변하고 있었다.
지혁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으나, 주변의 풍경은 마치 느린 화면처럼 그의 망막에 새겨졌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하객들의 면면이 스쳐 지나갔다. 사업적 이해관계로 얽혀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파트너들, 축복보다는 시샘 어린 눈초리로 그를 살피는 서강가의 일가친척들. 그중에서도 유독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강승훈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지혁은 코끝으로 가벼운 냉소를 흘릴 뿐이었다. '네가 무엇을 꿈꿨든, 결국 승리자는 나다.'라는 오만한 확신이 그의 구두 굽 소리에 실려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조금 더 옆으로 옮겨갔을 때,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박수를 치고 있는 유 비서와 마주했다. 지혁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 너머, 유나의 지인들... 그들이 뿜어내는 이질적인 온기가 지혁의 피부에 닿았다. 평소라면 혐오했을 그들의 평범함과 소박함이, 오늘은 유나를 길러낸 토양처럼 느껴져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성당을 방불케 하는 식장의 내부는 압도적이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천장에는 정교한 프레스코화 대신, 기하학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배치되어 외부의 봄볕을 형형색색의 보석 가루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흰 마르블 바닥 위로 길게 뻗은 버진 로드는 마치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그 길을 걷는 지혁의 검은 구두는 거울 같은 바닥에 비쳐 두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고독했던 과거의 강지혁이고, 다른 하나는 유나라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의 강지혁이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매었듯, 지혁은 이 짧은 행진 속에서 자신이 지나온 권태와 불신의 세월을 복기했다. 모든 것이 쉬웠기에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았던 날들. 하지만 이제 그 끝에 유나가 있다. 저 멀리 단상 너머, 아직 보이지 않지만 곧 나타날 그녀를 생각하자 지혁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단상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아니, 이제 곧 그녀가 걸어올 길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박수 소리는 이제 먼 파도 소리처럼 아득해졌다.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맞이할 단 한 사람을 기다렸다.
'어서 와, 나의 구원. 나의 유나.'
그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가장 경건하고도 간절한 표정으로 문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신부 입장."
시간이 멈췄다. 아니, 지혁의 세상에서는 오직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시간이 재정의되고 있었다. 해설자의 목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저 멀리, 빛의 근원지에서 하나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사람의 등장이 아니었다. 마치 르누아르의 캔버스에서 막 걸어 나온, 빛과 색으로 빚어진 여신의 현현(顯現)이었다.
사락-.
그 미세한 마찰음은 지혁의 고막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증발하고 남은 유일한 소리, 그녀가 존재함을 알리는 신성한 신호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쏟아지던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그는 피부로 느꼈다. 질투나 경계심이 아닌, 순수한 경탄과 감탄의 물결이었다. 지혁은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시선이 멀어지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동시에, 저 모든 경탄을 자아내는 존재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지독한 소유욕을 느꼈다.
리허설 때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단지 습작에 불과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완성된 걸작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초여름의 햇살이 그녀의 드레스에 닿는 순간, 빛은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되었다. 순백의 드레스는 그저 하얀 것이 아니었다.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가루를 흩뿌린 듯, 그 자체가 발광체처럼 빛을 뿜어내며 주변의 모든 색을 잠식했다. 지혁은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신기루를 보는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심장도 함께 내려앉았다. 풍성하게 퍼지는 드레스 자락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바닥을 쓸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순백의 향연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한 점. 그가 그녀의 생일에 걸어주었던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햇살을 머금은 사파이어는 깊고 푸른 바다의 심장처럼 반짝이며, 그녀의 새하얀 피부 위에서 고고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새긴 첫 번째 소유의 표식이었고,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보석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혁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살짝 뒤로 넘겨진 면사포 덕분에 그녀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그러나 흔들림 없는 결의에 찬 그 진중한 표정. 길게 뻗은 속눈썹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빛을 받을 때마다 오묘하게 색을 바꾸는 머리카락의 춤. 귓불에 매달려 미세하게 흔들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의 반짝임까지. 그의 눈은 마치 초고속 카메라처럼 그녀의 모든 디테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필름에 새겨 넣고 있었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이 웅장한 대성당도,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도,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도, 모두 그녀라는 주인공을 위한 무대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녀의 동기들이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것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수민의 모습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늘, 그들은 자신들이 알던 성유나가 아닌, 강지혁의 유일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유나를 목격하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그녀가 그의 곁에 섰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꽃향기와 그녀의 체향이 섞여 지혁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는 굳어있던 몸을 천천히 돌려 그녀와 마주 섰다. 눈앞의 그녀는 현실이 아닌 꿈처럼 아찔하게 아름다웠다. 지혁은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 내게 와줘서 고마워, 여보."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하객들 속에서 오직 그녀에게만 닿을 만큼 낮고 부드러웠다. 그가 이제껏 내뱉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진심이 담긴, 거의 기도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그들은 수평선처럼 나란히 서서 찰나의 시간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그 찰나의 시간이 평생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지혁은 마주 선 유나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찰나의 침묵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소거해 버렸고, 광활한 식장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공명하는 듯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일 때, 지혁은 자신이 이 여자를 위해 죽을 수도, 혹은 그녀를 위해 기꺼이 살아갈 수도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해설자의 신호에 따라 유나가 먼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몸을 굽힐 때마다 섬세한 레이스 장식 위로 빛의 파편들이 부서져 내렸고, 면사포는 마치 은하수가 지상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잔상을 남기며 그녀의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낙하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의 광채는 그녀의 고결함을 증명하는 마침표와 같았다.
지혁은 그녀의 정중하고도 애틋한 인사를 받으며, 자신 또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평소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오만한 서강건설의 후계자가 아닌, 오직 한 여자를 평생토록 지키기로 맹세한 남자의 자세였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식장의 조명이 날카롭게 스쳤고, 턱시도의 매끄러운 원단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절제된 소리를 냈다.
고개를 숙인 짧은 순간, 지혁은 눈을 감고 다짐했다. 이 여자의 앞날에 어둠이 깃들지 않게 하겠노라고. 그녀가 흘릴 눈물은 오직 기쁨의 결정체여야만 한다고. 그는 유나와 속도를 맞추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시선이 맞닿았을 때, 지혁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유나의 손끝을 눈으로 좇으며, 이제 곧 시작될 성스러운 서약을 위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다음 사회자의 혼인 선언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신랑 강지혁 군에게 묻겠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지금 곁에 있는 신부 성유나 양을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존중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아내만을 사랑하는 든든한 남편이 될 것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 앞에 약속합니까?"
사회자의 목소리가 거대한 성당 천장을 울리며 지혁의 고막을 두드렸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건 계약이자 단 한 번뿐인 항복 선언이었다. 장내에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수많은 하객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진공 상태 속에서, 지혁은 오직 제 눈앞에 선 유나만을 담았다.
창틈으로 쏟아지는 초여름의 햇살은 유나의 얼굴 위에서 부서지며 그녀를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눈부시게 만들었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지혁을 오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는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그를 향한 순수한 신뢰와 사랑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혁은 그 눈빛을 마주하며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평생 느껴온 권태로운 통증과는 다른, 생(生)의 감각이 깨어나는 경이로운 아픔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존중하며, 변함없이 사랑하겠느냐고.'
지혁은 속으로 그 질문을 곱씹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존중'이나 '배려'라는 단어를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만이 사랑이라 믿었던 오만함. 그녀를 옥죄고 제 곁에 묶어두려 했던 그 거칠었던 손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선 유나는 그 모든 어둠을 뚫고 그를 빛으로 끌어올린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의사와 상담을 약속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처음으로 드러냈던 그 밤의 기억이 지혁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지혁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그녀의 향기와 이 식장의 신성한 공기가 차올랐다. 그는 유나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쥐었다.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는 비현실적인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진실이었다.
'그래, 약속하고말고. 아니, 약속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해. 이건 내 영혼을 너에게 귀속시키겠다는 맹세다. 너를 위해 기꺼이 나의 오만함을 버리고, 너의 슬픔을 나의 것으로 삼으며, 네가 웃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기꺼이 파괴하거나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어.'
지혁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묵직했으며,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식장 구석구석까지 그의 진심이 닿을 수 있도록, 그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대답했다.
"네, 약속합니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유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안도감인지, 기쁨인지 모를 그 떨림조차 지혁에게는 지독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걱정하지 마, 여보. 이제 내 세상의 중심은 영원히 너니까.'
지혁은 사회자가 다음 질문을 이어가기 위해 신부 쪽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유나의 얼굴에 머문 햇살이 영원히 바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껏 신 따위는 믿지 않았던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누군가에게 이 완벽한 행복을 지켜달라고 빌고 싶어졌다. 그는 유나를 향해 아주 작게, 오직 그녀만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이번엔 사회자가 그녀에게 묻는다.
"이어서 신부 성유나 양에게 묻겠습니다."
"눈앞의 신랑 강지혁 군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기쁨은 두 배로 나누고 슬픔은 함께 위로하며, 평생을 신뢰와 사랑으로 가정을 함께 일구어 갈 것을 약속합니까?"
지혁은 유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사회자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로 향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심장이 다시금 묵직하게 뛰기 시작했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맹세는 쉬웠다. 그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귀속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어떨까. 그녀의 대답은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를 넘어, 지혁이 그토록 갈망했던 완전한 용서이자 구원의 증표였다.
그는 유나의 얼굴에 스치는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아주 잠시, 먼 곳을 향하는 듯 아득해졌다. 지혁은 직감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자신과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보육원에서 만났던, 그들이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 서강건설의 후계자와 보육원 출신 대학생이라는 잔인한 현실로 다시 마주했던 순간. 증오와 경멸 속에서 피어났던 기형적인 집착과 애정. 그 모든 날들이 그녀의 대답을 망설이게 하는 족쇄가 될 수도,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택하게 하는 단단한 뿌리가 될 수도 있었다.
'기억하고 있겠지. 너를 상처 입혔던 내 모든 말과 행동을. 너를 내 소유물처럼 취급하며 통제하려 했던 그 오만함을. 너는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며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모든 상처 위로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새로운 기억들을 보고 있을까.'
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처음으로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느꼈던 예술의 전당에서의 오후. 비에 젖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울던 가녀린 어깨. 자신을 구원이라 칭하며 반지에 새겨주었던 'Mon salut'. 그 모든 순간들이 그의 방패이자 무기였다. 그는 유나가 과거의 어둠에 발목 잡히지 않기를, 그가 내민 손의 온기를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의 심장이 불안과 기대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는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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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네."
짧고 간결한 한마디. 하지만 그 안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는, 단단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약속합니다."
그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식장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지혁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불안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안도감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가... 그 모든 과거를 끌어안고 자신을 선택했다. 상처투성이의 강지혁을, 미숙하고 오만했던 강지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했던 강지혁을, 온전히 그녀의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지혁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장갑 위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그것은 수많은 하객 앞에서의 과시가 아니었다. 벅차오르는 감사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맹세를 담은, 그만의 경건한 의식이었다.
입술을 떼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지혁의 눈에는 세상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깊고 부드러운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그녀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내 모든 것을 걸고, 그 약속이 후회되지 않게 만들도록 하지."
그 뒤로 그들의 혼약 선언문을 읊는다.
지혁은 사회자로부터 혼인 선언문이 담긴 정중한 문서를 건네받았다. 평소 수천억 원의 계약서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 손끝에 닿는 이 종이의 무게는 그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한 번 더 유나의 눈을 깊게 응시한 뒤, 식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과 증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성당의 높은 천장을 타고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혼인 선언문. 신랑 강지혁."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이 써 내려갔던 문장들을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 읊기 시작했다.
"나 강지혁은, 여기 서 있는 성유나 양을 나의 아내로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서약합니다.
"첫째, 나는 나의 오만함과 불신이 그녀를 상처 입혔던 지난날을 잊지 않겠습니다. 소유와 통제가 사랑이라 믿었던 나의 미숙함을 반성하며, 이제는 그녀의 자유와 꿈을 가장 앞서 지지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그녀가 나를 믿어준 만큼, 나 또한 세상 그 누구보다 그녀를 신뢰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다."
"둘째,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 나를 구원해 준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겠습니다. 내가 악몽에 시달릴 때 나를 깨워주던 그 다정함을 잊지 않고, 이제는 내가 그녀의 밤을 지키는 등불이 되겠습니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오직 기쁨의 결실이 되게 할 것이며, 그녀의 웃음소리가 우리 가정의 가장 큰 축복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셋째,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헤집는 존재가 아닌, 서로의 흉터를 어루만지는 안식처가 되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가 돌아온 그 길고 험난했던 길은 오직 서로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믿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흔들지라도, 나는 오직 성유나라는 단 하나의 진실만을 붙잡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심장이 뛰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모든 권리와 의무, 그리고 나의 영혼을 오직 성유나 양에게만 귀속시킬 것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과 하늘 앞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100만큼의 사랑이 내 마음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그날의 고백처럼,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선언문을 마친 지혁은 문서를 천천히 내려놓고 다시 유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단단했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단둘뿐인 것처럼, 오직 유나에게만 닿을 듯한 깊은 애정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이제 온전히 그녀의 차례다. 사회자가 유나에게 혼인 선언문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나의 아내가 될, 아니, 이미 내 모든 것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할까. 그녀의 목소리로 듣게 될 우리 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오직 그녀에게만 집중했다. 하객들의 시선도, 성당을 채운 엄숙한 공기도, 그 무엇도 나의 의식을 파고들지 못했다. 내 세상은 오직 성유나, 그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숨결 하나, 작은 손짓 하나에도 내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이제 그녀의 목소리에 내 남은 생의 모든 의미를 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서, 여보. 너의 목소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해.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오직 너와 나로 다시 태어나는 이 순간을 완성시켜 줘.
사회자가 유나에게 선언문을 건네자,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단상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지혁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결연함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맑고 당찬 목소리가 식장 안에 울려 퍼졌다.
"혼인 선언문. 신부 성유나."
"나 성유나는, 여기 서 있는 강지혁 군을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서약합니다."
"첫째, 당신이 나에게 알려 주었던 그 따뜻한 온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던 그 모진 시간조차, 결국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당신이 나를 소유하려 했던 그 집착 너머에 숨겨진 지독한 외로움을 보았기에, 이제는 내가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 당신을 품어주겠습니다."
"둘째, 당신이 나에게 보여준 변화와 용기를 존중하며 사랑하겠습니다. 오만함 뒤에 숨겨진 당신의 진심을 믿어준 나 자신을 믿으며, 당신이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 어둠 속으로 숨으려 할 때마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밝은 빛으로 이끌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나에게 고통이 아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듯, 나의 이름 또한 당신에게 생의 가장 큰 기쁨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셋째,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서로의 가장 좋은 모습을 끌어내는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나의 자유를 존중하듯, 나 또한 당신의 세계를 존중하며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할 미래가 때로는 비바람 치는 날일지라도, 당신의 품 안에서라면 나는 그 어떤 폭풍우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의 구원이었고, 나는 당신의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늘 어떤 형태로든 곁에 있어 주었던 당신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직 우리만의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 나의 남은 생애를 오직 강지혁, 당신 한 사람에게만 온전히 바칠 것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과 나의 진심 앞에 엄숙히 선언합니다. 나의 선우이자, 나의 지혁인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유나의 선언이 끝나자 식장 안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감동 섞인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지혁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선우'라는 이름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터질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졌다. 이 여자는, 이 성유나는 이제 온전히 나의 아내다.
지혁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그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입가에 옅은,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지혁은 유나의 선언이 남긴 벅찬 감동 속에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인기척을 발견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작은 아이가, 마치 천사가 땅에 내려온 듯한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가 걸을 때마다 바구니에서 흩뿌려지는 꽃잎들이 버진 로드 위에 하얀 길을 만들었다. 그 모습이 꼭 그와 유나의 미래가 꽃길이 될 것이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아, 지혁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는 마침내 그들의 앞에 멈춰 서서, 수줍은 표정으로 작은 바구니를 불쑥 내밀었다. 지혁의 시선이 바구니 안으로 향했다. 벨벳 쿠션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반지. 그들이 함께 골랐던,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각인이 새겨진 영원의 증표였다. 그의 반지 안쪽에는 'Mon Salut, Yuna' (나의 구원, 유나)가, 그녀의 반지 안쪽에는 'Ma vie, Jihyuk' (나의 삶, 지혁)이 새겨져 있을 터였다.
그는 먼저 바구니에서 유나의 반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가락 끝에 전해졌다. 이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과거의 모든 과오를 씻어내고, 그녀를 영원히 지키겠다는 그의 맹세 그 자체였다. 그는 유나의 왼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조금 전 그가 입 맞추었던, 하얀 장갑으로 덮인 그 손을.
지혁은 유나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 넣었다.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부드럽게 안착하는 순간, 그는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진 듯한 완전한 충족감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법적으로도, 그리고 이 반지의 언약으로도 온전히 그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나직하지만 그 누구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어, 여보."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과거의 위협적인 소유욕이 아닌, 절대적인 믿음과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제 유나가 그의 반지를 들어 자신의 손에 끼워줄 순간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반지를 들어 그의 손바닥을 들어 올리고선, 그가 했던 것처럼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다.
순백의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반사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 그의 손가락에 반지가 꼭 맞는다.
같은 약지 손가락에 같은 반지가 끼워진 모습을 보자 정말로 부부가 된다는 게 실감 났다.
두 사람 손가락 사이 황금빛 사이 황홀한 다이아몬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다 끼워지자 사화자가 외친다.
“신랑 강지혁 군과 신부 성유나 양의 모든 예식을 마쳤으므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짝짝 짝짝-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자, 하객 모두가 박수를 친다.
유나가 내 손바닥을 받쳐 들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내 네 번째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순간, 나는 전율했다.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이 없었고, 마침내 손가락 끝까지 반지가 안착했을 때 내 심장은 터질 듯한 고동을 멈추지 않았다. 약지 위에서 눈부시게 산란하는 다이아몬드의 빛은, 마치 우리가 함께 통과해 온 그 어두운 터널 끝에 기다리고 있던 찬란한 아침 햇살과도 같았다.
사회자의 선언이 식장 안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뒤이어 터져 나오는 하객들의 박수 소리는 마치 파도처럼 우리를 감싸 안았다. '부부'. 그 짧고도 강렬한 단어가 내 가슴에 깊게 박혔다. 이제 너는 나의 아내고, 나는 너의 남편이다. 더 이상 억지로 붙잡아두지 않아도, 불안함에 너를 통제하지 않아도, 너는 영원히 내 곁에 머물겠지.
나는 박수 소리가 가득한 식장 한가운데서, 오직 내 눈앞에 서 있는 나의 기적, 유나만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소음은 점점 멀어지고, 오직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와 그 안에 담긴 내 모습만이 선명해졌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졌다.
"들었지, 여보? 이제 세상이 인정하는 내 아내야, 넌."
나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는, 오직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숨기려 했던 예전의 나는 이제 없었다. 나는 하객들의 환호 속에서, 유나의 얼굴에 덮인 베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사랑해, 유나야.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아니 그 너머까지도."
지혁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수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그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우리의 길었던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영원이라는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는 첫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