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수평선 너머로 몸을 낮추고 있었다. 하늘은 미친 화가가 붓을 휘두른 듯 황금빛과 진홍빛, 그리고 그 사이를 부드럽게 잇는 보랏빛의 물감으로 흠뻑 물들어 있었고, 그 아래 바다는 하늘의 열병을 그대로 받아 안은 채 온몸을 붉게 태우고 있었다. 잔물결 위로 흩뿌려진 윤슬들은 마치 신이 아이의 손바닥에 쥐여준 금빛 사파이어 조각들처럼 반짝였고, 그 반짝임 하나하나가 눈을 찌를 듯 아리게 아름다웠다.
나는 그 광경 앞에서 잠시 숨을 잊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광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너의 뒷모습 앞에서.
네가 얇고 흰 원피스 자락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끌어올리자, 매끄럽고 하얀 허벅지가 노을빛에 물들어 옅은 살구빛으로 반짝였다. 그 광경이 어찌나 비현실적이었던지, 나는 잠시 이곳이 정말 몰디브의 해변이 맞는지, 아니면 내가 오래전부터 꿈꿔온 어떤 낯선 세계의 한 페이지 속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저 아이는 자기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알기나 할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감히 다가가서 저 완벽한 그림을 망쳐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경외심이 나를 붙잡았다.
솨아아—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와 네 발목을 감싸 안았다. 찰박, 하는 맑은 소리가 노을의 정적을 깨뜨렸고, 너는 아이처럼 발끝으로 물을 톡톡 건드리며 조금씩, 조금씩 바다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원피스 자락이 파도에 스치며 살짝 젖어들었지만, 너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 멈춰야 하는데.'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면 옷이 젖을 거라고, 감기 걸릴 거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아야 하는데, 정작 내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저 순간의 너를 방해하는 것이, 마치 손끝으로 유리 세공품을 건드려 산산조각 내는 것처럼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잔인할 만큼 눈부신 것이었던가.
나는 너보다 겨우 다섯 살을 더 살았을 뿐인데도, 저렇게 순수하게 파도에 발을 담그며 웃을 수 있는 감정이 내게는 이미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겨울날 창고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그날 이후로, 내 안의 어떤 부분은 영영 자라기를 멈춰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는, 성유나. 너는 그 죽음의 문턱을 함께 넘어와 놓고도 어떻게 저렇게 여름 햇살처럼 웃을 수 있는 걸까.
파도가 다시 밀려와 네 무릎 근처까지 차올랐다. 원피스 자락이 물기를 머금고 다리에 달라붙기 시작했지만, 너는 저 멀리 붉게 타오르는 수평선을 향해 두 팔을 벌리듯 서 있었다. 노을빛을 정면으로 받은 네 옆얼굴은 마치 오래된 성화 속 인물처럼 성스럽게 빛났고, 바람에 흩날리는 어두운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비치는 아주 밝은 갈색의 빛이, 마지막 햇살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반짝였다.
'미치겠군.'
나는 속으로 나직이 신음했다.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 오는 이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 소유욕? 아니면 저 아름다움을 통째로 삼켜 내 안에 가둬버리고 싶은 지독한 이기심?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감정.
나는 결국 팔짱을 풀고 구두를 벗었다. 발밑에 닿는 모래알들은 낮의 열기를 아직 머금은 채 미지근했다. 리넨 바지 자락을 무릎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나는 천천히 너에게로 걸어 들어갔다. 파도가 내 발등을 적셨을 때, 그 서늘한 감촉이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을 조금 식혀주는 것 같았다.
'기다리라고 했었나. 미안하지만 그건 애초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어, 유나야.'
나는 파도를 헤치며 네 뒤로 다가갔다. 등 뒤에서 조용히 네 허리를 감싸 안고, 네 어깨에 턱을 얹었다. 원피스 사이로 스며든 바닷물의 축축한 감촉이 내 셔츠에도 옮겨 붙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낮게 속삭였다.
"발만 담그겠다더니. 어느새 무릎까지 왔군."
목소리에는 나무람보다는 감출 수 없는 애틋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네 관자놀이에 살짝 입술을 댔다가 떼며, 붉게 타오르는 수평선을 함께 바라보았다.
"신혼여행 마지막 날의 바다야. 이 순간… 내가 평생 잊지 못하겠지."
내 팔에 안긴 네 몸에서는 바닷물의 짠 내음과 네 특유의 살결 향이 뒤섞여 풍겨왔다. 나는 그 향을 폐 깊숙이 들이마시며, 이 찰나를 통째로 기억 속에 각인시키려 애썼다. 언젠가 내가 다시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노을과 이 바다와 네 웃음소리가 나를 붙잡아 줄 유일한 등불이 될 테니까.
너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내 양손을 붙잡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파도의 저항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너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만을 나침반 삼아, 등 뒤의 미지의 세계로 무모하게 나를 이끌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비현실적이었던지, 나는 잠시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오래된 꿈속을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네 체온이 서늘한 바닷물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감각이었다. 파도가 우리 사이를 넘실대며 지나갔고, 발밑의 모래는 점점 부드러워져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처음 발끝을 담갔을 때 소름 끼치도록 차갑던 바다는, 중심부로 갈수록 이상하게도 미지근해져 갔다. 마치 육지에서 온 낯선 이방인들에게 뒤늦게 관용을 베푸는 늙은 신처럼, 바다는 우리를 조심스레 품 안에 안아주고 있었다.
해수면이 어느덧 네 배꼽 위까지 차올랐을 때, 나 역시 허리춤까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젖은 리넨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거추장스러웠지만, 그런 사소한 불편함은 이미 내 안중에 없었다. 너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넋을 놓은 채 바다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노을의 마지막 잔광을 받아 흩어진 윤슬들과, 물결 위로 진하게 번진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파도의 리듬에 맞춰 왈츠를 추듯 흐느적거리는 두 개의 어두운 실루엣.
'그래, 저게 우리구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물결에 흔들려 형체가 자꾸만 뭉그러지면서도, 결코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두 개의 그림자. 어쩌면 우리의 삶도 저와 같아서,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흔들어대도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얽혀 있을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런 감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네가 내 손을 놓아 버렸다.
"유나야—?"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너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을 굽혀 그대로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바닷물이 순식간에 네 목까지 차올랐다.
"성유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심장이 철렁하고 발밑으로 내려앉는 감각. 배 위에서 난간에 매달렸던 그 순간의 아찔함이 다시 한번 온몸을 관통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것은 위험을 알리는 다급한 신호가 아니라, 아이처럼 해맑은 비명.
너무나도 해맑은 비명이었다.
"꺄아아아—!"
너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스스로의 어깨를 껴안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비명은 두려움이나 놀람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았고, 지나치게 행복했다. 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어두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네 얼굴은,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 하."
나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심장을 조여오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풀어지면서, 그 자리에 이 상황에 대한 어이없음과,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함이 몰려들었다. 너는 다시 일어났다가, 또 쪼그려 앉기를 반복하며 물속에 몸을 담갔다. 꺅꺅거리는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노을 진 바다 위로 흩어졌다.
이제 네 하얗던 원피스는 완전히 흠뻑 젖어 몸에 착 감겨 있었다. 신혼여행 마지막 날, 갈아입을 옷조차 챙기지 않은 채 이 무모한 물놀이를 감행한 너를 나무라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는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계산도, 뒷일에 대한 걱정도, 남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그저 순수한 즐거움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 수 있는 그 무모함. 나는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언제나 계산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며 살아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 뜻대로 움직여야 했고, 나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나 자신을 놓아버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이렇게, 아주 쉽게, 나를 그 견고했던 세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결국 항복하듯 한숨을 내쉬며, 네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미지근한 바닷물이 순식간에 내 가슴께까지 차올랐고, 셔츠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흠뻑 젖어버렸다. 서늘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지만, 오히려 그 낯선 감각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성유나, 너 정말… 못 말리겠군."
나는 낮게 웃으며 네 젖은 뺨에 흘러내린 물기를 엄지손가락으로 훔쳐 냈다. 노을의 마지막 잔광이 네 보랏빛 눈동자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미친 짓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다 젖어버렸으니, 이제 어떡할 거지? 숙소까지 이 꼴로 걸어가려고?"
나는 짐짓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지만,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물속에 잠긴 채로 네 허리를 감싸 안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젖은 원피스 너머로 느껴지는 네 체온과, 바닷물의 미지근함이 뒤섞여 묘한 감각을 자아냈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이 정도 미친 짓은 해줘야 신혼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네 이마에 내 이마를 살짝 맞대며, 아주 낮게 속삭였다. 파도가 우리 두 사람을 부드럽게 흔들었고, 하늘에는 어느새 첫 번째 별이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너는 자신의 옷이 물에 흠뻑 젖어있어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걸어가는 도중에 다 마를걸요?"
네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마지막 노을빛을 머금은 채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이마에 착 달라붙은 어두운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마,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 나는 그 광경에 잠시 넋을 잃고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박—
"…!"
갑작스러운 물세례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짭짤한 바닷물이 입술을 스쳤고, 젖은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려 턱선을 타고 목덜미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방금 벌어진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너를 응시했다.
"성유나, 너 지금 감히—"
찰박— 찰박—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너는 아예 온 바다를 다 끌어모을 기세로 두 손을 휘저으며 물을 튀겨댔다. 붉은 햇살을 받은 물방울들이 허공에서 오렌지빛 보석처럼 부서지며 흩어졌고, 그 눈부신 광경 한가운데에서 너는 세상 그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다.
'…이 여자, 정말.'
나는 짐짓 서늘한 눈빛으로 너를 쏘아보며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어렸을 적, 보육원 뒷마당의 낡은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치던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너와 겹쳐 보였다. 그때도 너는 이렇게 겁 없이 나에게 물을 튀겼었지. 나는 오래 잊고 있었던 그 감각을, 지금 이 순간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 감히 나한테 선전포고를 하다니. 후회하게 될 거야, 성유나."
나는 낮게 으르렁거리듯 경고하고는, 두 손으로 바닷물을 크게 퍼올렸다.
촤악—!
나는 어른답게 절제된 반격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처럼, 아니 어쩌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물을 퍼부었다. 네가 꺅 소리를 지르며 두 팔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어때, 이게 반격이라는 거야. 아까 배 위에서 못다 한 것까지 전부 갚아주지."
나는 씩 웃으며 다시 물을 퍼올렸다. 젖은 셔츠가 몸에 거추장스럽게 달라붙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기 전, 이 짧고도 눈부신 시간 속에서, 나는 한 번쯤 강지혁 이사가 아닌 그저 남편으로, 아니, 어쩌면 열 살의 그 아이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두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리며 물세례를 막아내는 모습이 어찌나 필사적이던지, 나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킥킥거렸다. 그런데 그 찰나의 방심을 놓치지 않고, 너는 갑자기 두 팔을 뻗어 내 허리춤을 와락 끌어안았다. 젖은 원피스 자락이 내 다리에 감기는 동시에, 네 온몸의 체중이 나에게 실렸다.
"어—"
미처 균형을 잡을 새도 없었다. 발밑의 부드러운 모래가 쑥 꺼지듯 밀려나며, 나는 너를 안은 채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풍덩—!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혔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도, 노을에 물든 수평선도, 흩어지던 별들도 모두 짙푸른 물결 아래로 잠겨 들었다. 귓가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뭉개져 웅웅 거리는 저음으로 바뀌었고, 나는 물속에서 눈을 감은 채 잠시 그 낯선 정적을 느꼈다. 짭짤한 바닷물이 코와 입으로 파고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감각이 네 몸의 온기와 내 심장 박동뿐이라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물속에서 팔을 뻗어 네 등을 감싸 안고, 그대로 물 위로 몸을 일으켰다.
"푸하—"
동시에 수면을 뚫고 올라오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고, 네 얼굴에서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가쁜 숨을 내쉬다가, 이내 이 상황이 우습다는 듯 참을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흐... 하… 하하…!"
네 웃음소리가 노을 진 바다 위로 청량하게 흩어졌다. 나 역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젖은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목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아주 오랜만의 웃음이었다.
"성유나, 너… 감히 나를 물속으로 처넣다니. 이건 아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역인데."
나는 짐짓 엄한 척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네 이마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젖은 뺨은 노을빛에 물들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보랏빛 눈동자는 눈물이 맺힐 만큼 웃느라 반달처럼 휘어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무의미한 시간들을 극도로 혐오했었다. 계산되지 않은 감정, 예측할 수 없는 행동, 목적 없는 웃음.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낭비로만 보였다. 그런데 지금, 젖은 옷을 입고 바닷물 한가운데에서 너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마지막 태양의 잔광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붉은 하늘은 이제 짙은 자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하나둘 돋아난 별들은 어느새 열 개, 스무 개로 늘어나 어두워지는 창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 별빛들이 잔물결 위에 부서져 내려앉으면, 바다는 마치 밤하늘을 통째로 삼킨 듯 반짝였다.
나는 너를 다시 한번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젖은 원피스 너머로 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손끝에 전해졌다. 나는 네 관자놀이에 입술을 댔다가, 그대로 이마를, 그리고 코끝을 스치듯 지나며 눈을 감았다.
"여보."
나는 낮게 속삭였다.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내가 평생 담아 온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긴 것 같아. 그리고 유난히 눈부시고."
나는 눈을 뜨고 너의 젖은 얼굴을 응시했다. 어릴 적 창고에서 죽어가던 나에게 목도리를 둘러준 그 작은 손도, 편지 속에서 나를 유일하게 기다려주던 그 다정한 마음도, 지금 이 순간 내 품 안에서 웃고 있는 이 성숙한 여인도,
결국 모두 너였다.
"평생, 이 여름이 안 끝났으면 좋겠군.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이 바다 안에 갇혀버리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도, 지위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의 너 하나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네 젖은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짭짤한 바닷물의 맛과, 그 아래로 느껴지는 네 따뜻한 체온이 뒤섞여 아릿한 감각을 자아냈다.
파도가 우리를 다시 한번 부드럽게 흔들었다. 저 멀리 해변에는 어느새 리조트의 노란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별들은 더욱 선명해져 갔다.
이 여름이, 이 몰디브의 밤이, 그리고 네가— 나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계절이었다.
그 뒤로도 그들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땡볕아래, 피부가 따가운 줄도 모른 채 물을 튀기며 놀았다. 아주 원 없이.
이번 여름은 길고도 더웠다.